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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본원적 기반, 가족

현재와는 사뭇 위상과 의미가 달랐던 과거의 가족 공동체

by spiritual-journey 2025. 1. 17.
그곳은 집이었다. 집은 강한 힘을 가진 이름이자 단어이다. 주술사가 읊는 어떤 주문보다도, 혹은 영혼이 응답하는 어떤 주술보다도 강하다.

 

But it was home. And though home is a name, a word, it is a strong one; stronger than magician ever spoke, or spirit answered to, in strongest conjuration. (Charles Dickens, Martin Chuzzlewit 444)

 

19세기 중반 사람들의 모습과 삶을 생생하게 묘사했던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는 미국을 여행했던 경험을 담아 저술했던 마틴 처즐위트의 생애와 모험(The Life and Adventures of Martin Chuzzlewit)에서, 사업을 도모하던 차에 미국을 방문하고 시찰했다가 건강과 경제적 상황이 더욱 빈곤해진 상태로 고향으로 돌아온 마틴 처즐위트(Martin Chuzzlewit)와 마크 태플리(Mark Tapley)의 고향 귀환 소감을 위와 같이 표현하였다.

 

일반적으로 "정다운 고향, 즐거운 우리 집"(home sweet home)이라는 관용적 표현을 쉽게 떠올릴 수 있듯, 어떤 여의찮던 고생을 했더라도 집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면 으레 안정감이 느껴지고 마음이 평안해지는 듯하다. 인간의 역사와 더불어 시간을 초월하면서도 보편적인 사회제도인 "가족"은 언제나 권장받는 성역과 같은 사랑과 친밀성의 보루였을까?

 

 

 

역사적으로 서양에서는 가족이나 가정에 대한 개념이 "공적 영역"보다는 "사적 영역"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과거 오랫동안은 공적인 영역인 국가와는 대립하는 개념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바람직한 공동체에 대한 고찰에 천착했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소크라테스(Socrates)의 제자인 플라톤(Plato)은 이상 국가론을 펼치며 다수가 더불어 잘 살아갈 수 있는 공화국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는데, 그는 "내 것", "네 것"의 경계를 없애는 것이 분열을 막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특히 통치 계급인 수호자들은 재산뿐만 아니라 가족도 사적으로 구성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사적인 영역을 지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플라톤과는 달리 가족을 국가 공동체의 세포와 같은 근원으로 간주하였으나, 전체적이고 완전한 공동체로서 본성적으로 국가가 우선한다는 입장에 있어서는 플라톤과 같았다.

 

비슷한 맥락에서 중세 후기의 법조인이자 정치가였던 토머스 모어(Thomas More)의 유토피아론도 떠올려 볼 수 있다. 플라톤과 같이 공동체적 선에 대해 거듭 숙고했던 모어는 현명하고도 성스러운 제도가 구현된 유토피아라는 섬을 상정하고 다수의 복지를 위한 최선의 방법에 대해 의견을 피력한다. 유토피아론에서도 국가 공동체가 더 우선시되기 때문에 위계 구조와 질서는 엄격해야 하고 재화나 자원, 도시의 인구도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분배와 이동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권장된다.

 

전쟁이 잦았던 고대와 중세 시대에는 다면적으로 부강한 국가를 이룩하는 것이 최고의 공동체적 선이었다. 이를 위해 개개인이 염두에 두고 추구해야 할 중요한 덕목은 개인적 욕망을 자제할 수 있는 "절제"였다. 합리적 이성과 공동체 의식에 따라 행동하며 각자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 "정의"를 구현하는 바람직한 삶이라고 여겨지던 시대에 가족과 같은 "사적 영역"은 사리사욕이 발로될 수 있는 이기주의의 원천과 같은 지점이었다.

 

사회적 입장뿐만 아니라 종교적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중세에 가계, 가계의 명예, 구성원들 사이의 연대를 찬미하는 것은 전형적인 세속적 태도였기 때문에 교회는 이를 경계하거나 애써 무시해 버렸다”(The medieval glorification of the line, its honour, and the solidarity between its members, was a specifically lay attitude which the Church distrusted or ignored, 356)고 프랑스의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ès)아동의 탄생(Centuries of Childhood)에서 지적한다. 과거 서구의 사회에서 가족 공동체는 존중받고 권장되는 성역이라기보다는 때에 따라 억압 또는 해체가 권유되는 대상이었다.